어바웃 케빈

2012. 1. 16. 20:03마음에남아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감독 린 램지
틸다 스윈튼, 이즈라 밀러, 존 C. 레일리


  '괴물'은 어떤 식으로 탄생하는 것일까? 우리는 평범하지 않은 이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그의 어린시절을 되짚는다. 여기서 추론되는 결과는 무척 간단하다. 범죄자들은 대부분이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사랑에 굶주려서 혹은 세상 사람들의 멸시로 인한 복수심 때문에 기타 등등. 아무튼 이런 사람들은 악에 받쳤던 어린시절에서 정신은 그대로 몸만 성장한다. 신체적으로 힘을 얻으면 본격적으로 나름의 심판을 시작한다. 가장 가깝게는 가족, 더 나아가서는 세상 모두(라고 해봤자 결국 자신보다 약자)를 상대로. <어바웃 케빈>은 우리가 모두 아는 '괴물'의 탄생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이번엔 그 괴물을 낳아 길러낸 어머니의 시선에서. 여기서 어머니가 틸다 스윈튼이라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그녀의 존재감은 극중 괴물, '케빈'만큼이나 어마어마하므로.
  영화는 시작부터 시각적인 자극이 대단하다. 하지만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피가 난자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은유적으로 붉은 이미지들이 나열될 뿐이다. 이것은 '에바'의 심리상태를 잘 드러내준다. 스페인 토마토 축제에서 한껏 즐기던 그녀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 거린다. 그리고 눈을 뜨면 현실. 빛이 들어올 틈이 없는, 커튼을 가득 드리운 그녀의 방. 침대 위 그녀는 멍하니 누워있다. 그녀의 하얀 집과 자동차는 붉은 페인트를 사정없이 뒤집어 썼다. 그녀는 앙상한 두 볼에 푹 꺼진 눈을 하고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으로 일어선다. 비척비척, 겨우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는 두 손을 한없이 붉게 물들여가며 페인트를 지워낸다. 필사적으로. 그것은 발악 같기도 하며, 때로는 인내와 순응의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파괴되어버린 '에바'의 삶처럼, 피폐해진 정신처럼 조각조각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무척이나 무미건조하게 툭 툭. 생기 없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버렸다. 눈을 뜨고 있지만, 정작 현실을 보고 있지는 않다. 외면하는 건지, 애써 피하는 건지. 아마도 마주할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도. 그녀는 여전히 과거에 매여 있다. 스스로가 납득할 답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다. 당연한 수순처럼 케빈의 지난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왜? 케빈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면접을 보러 가서도, 마트에 장을 보러 가서도, 길을 걷가다도. 쉴 새 없이 흘깃거리고, 무언의 폭력을 행사(물론 직접적으로 뺨을 때리기도 한다)하는 이웃 사람들을 감당해야 한다. 물론 그녀는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한다. 이것이 '괴물'을 낳은 어머니의 죄값이라면 죄값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마트에서 이웃을 피해 도망치는 곳은 토마토 소스가 가득한 식료품 코너. 그녀의 숨이 멎을 듯 긴장에 찬 표정과 대비되는 차갑고 조용한 통조림의 나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음악과 축제의 등장이었다. 영화 초반 토마토 축제에 이어 할로윈, 크리스마스 등 끔찍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다른 이들은 시간이 지나 때가 되면 축제를 즐기고 이를 이어나간다. 다만 과거와 현실 사이에 엉성하게 끼어버린 '에바'만이 축제에 어울리지 못하고 공포를 느낄 뿐이다. '에바'에게 무척 공포스럽고 중요한 시점에는 항상 밝은 팝송이 흘러나온다. 화면의 긴장감과는 다른 분위기의 노래들이 또 다른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웃고 즐기는 모습, '에바'에게는 그들이 '괴물'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다른 이들의 눈에는 '에바'가 '괴물'로 느껴지겠지만(정확히 하자면 '괴물' 간수를 못한 무능한 어머니겠지만).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 괴리감, 공포.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아니 '케빈'을 낳기 전까지의 그녀 역시 축제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이리저리 여행 다니며 흥청망청 취하는, '어머니'가 되기 전의 그녀는.
  어쩌면 그녀는 '케빈'을 낳은 후에도 어떤 의미에서는 '어머니'라 부르기 조금 어려운 상태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현재까지도.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모두 진짜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에바'는 어린 '케빈'에게 말한다. 네가 태어나기 전이 정말 좋았다고, 프랑스에서 아침을 맞고 싶고, 도시가 아닌 곳으로 떠나기 싫다고 말이다.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준비되지 않은 엄마였던 그녀는 끊임없이 소리친다. 갓 태어난 '케빈' 역시 그런 그녀에게 반항하듯 울음을 멈출 줄 모른다. 아이를 달래다 지친 그녀는 소음 가득한 공사장 한 복판에 유모차를 끌고 가기도 한다. 반쯤 멍한 표정으로. 이미 뱃속에서부터 '에바'와 '케빈'의 유대관계는 비틀어졌고, 금이 가고 있었다. '케빈'이 비로소 말을 하기 시작하고, 걷기 시작하면서 둘의 관계는 더욱 더 악화되기 시작한다. 애증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그런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영화는 '에바'와 '케빈' 모자를 제외한 주변 인물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남편과 둘째 딸에 관해서도. 남편은 아주 이상적인 존재로만 비춰진다. 마치 이야기 속 인물처럼. 사랑과 축복 속에 태어난 둘째 딸 역시 예쁘고 약한, 케빈의 악마성을 부추기고, 보여주기 위한 희생자 정도의 기능 밖에 하질 못한다. 이토록 '에바'와 '케빈'에게만 집중하는 영화이다보니, 사실 이게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부모의 관계 장면을 목격하고, '에바'에게 어린 '케빈'이 남녀의 정사에 대해 당돌하게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 또 커서는 자위행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 역시. 어머니를 성性적인 대상으로 인식하고 더욱 도발하는 모습들에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모자관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서로 사랑을 주고 받으리라 믿었던 관계가, 마치 신의 섭리인 듯한 관계가 애초부터 틀어지면서 얼마나 비극적으로 진화해가는지. 어쩌면 진화가 아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기질이었는지. 더 끔직하게 생각하자면, 그 기질이 관계의 실패에 따라 진화한 것인지.
  여기서 나는 의문이 들었다. 과연 사이코패스는 애초에 그렇게 탄생하는 것인가, 아니면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가. 물론 영화를 보다보니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란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같지만, 글쎄. 사실 '케빈'이 '에바'에 대해 갖는 분노와 적대감들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공감하기 어려웠다고 할까. 유난히 그가 민감한 것 같다는 생각도 종종 들고(물론 모든 인간이 다 무난하지 않으므로, 이런 경우 또한 이해가 가지만). 하지만 그렇게 타고났다고 하기에는, 애정결핍의 가장 대표적인 표현 중 하나로 손톱 물어뜯기가 '케빈'에게 나타나고, 동생이 태어난 후 처음으로 엄마의 품에 안겨 동화책을 읽는 장면 등은 역시 환경의 영향으로 '괴물'이 탄생한 것인가, 란 생각에 더 무게를 두게 만든다. 거기다 결국 '케빈'이 범행에 사용하는 활은 동화책 <로빈후드>에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결국 '케빈'은 관계의 실패에서 오는 상실감과 길 잃은 증오심을 거름 삼아 '괴물'이 되고야 만 것인가, 하는 결론에 닿았다. 또한 이것은 악마성 표출과 동시에 (그 대상은 언제나 '에바'에게로 국한된) 사랑 받고자 하는, 존재를 인정 받고자 하는 이중적 심리가 동반된 것인가. 정작 언제나 자신을 인정해주고 다정히 대해주던 아버지와 자신을 잘 따르던 동생은 죽이고, 적대적이던 관계의 어머니만 유일한 내 편으로 담겨둔 그의 행동.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에바'가 물에 얼굴을 담그고 허우적이다 '케빈'의 얼굴로 바뀌는 장면처럼. 결국 둘은 마주 앉아서 서로를 제대로 마주보지도 않지만, 결코 놓을 수 없는, 근본적으로 피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아... 아직 생각이 정리가 안 돼서 말이 너무 어수선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관객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을 그녀가 묻는다. "왜?" 이때 '케빈'은 이전과는 다른, 일말의 감정이 (그것이 후회든 아니든) 섞인 눈빛으로 "글쎄, 그때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라고 답하던 모습이 머릿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순간,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든 건.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