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22. 02:15ㆍ숨죽인마음
0.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던 '여혐'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건이 터진 직후, 우리집에 항상 틀어져 있는 종편뉴스에서는 '이걸 왜 여혐으로 몰아가느냐.', '그냥 정신병을 가진 개인의 문제일뿐.',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를 문제있는 국가로 이미지 메이킹(이라뇨? 원래 그런 나라가 맞는데요?) 하려는 젊고 드센 여자들이 문제다.' 등등의 개소리를 왈왈대고 있길래, 난 평소처럼 이 모든 사회의 이슈들을 한 귀로 흘려버리고 눈을 돌렸다. '어차피 헬조선 내가 고민한들 뭐가 달라지랴...! 난 원래 병신이니까 여태까지처럼 현실도피하며 나 즐거운 것만 보고 모른 척 살아갈테다!' 란 심정으로.
1. 자주가는 커뮤니티에서는 이 문제를 가지고 남자친구와 다투거나 심하게는 이별까지 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나에게만은 그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또 한번 병신처럼 이 주제를 필사적으로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 시내 곳곳 TV가 설치된 곳에선 이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래야만 했고, 그것이 맞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난 정말 겁쟁이 병신이었다. 어쨌거나 나의 필사적인 병신같은 노오력으로 나와 내 남자친구 사이에선 크게 논쟁이 벌어지진 않았다. 그 역시 조금 실망스럽게도(라고 적었지만, 막상 크게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보통의 평범한 남자들이 왜 저 병신 하나때문에 잠재적 범죄자 취급당해야 하는 것이냐?'라고 살짝 불만을 늘어놓았다. 난 거기에 '세상에 성이 2개밖에 없는데 (물론 다른 트랜스젠더나... 뭐 기타 등등의 성도 인정합니다만, 여기서 그런 자세한 것은 적당히 넘어갑시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쑻)'라고 농담으로 답하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 참 다시 생각해도 병신같다.
2. 나도 대학생 때나, 좀 더 삶에 열정이란 것이 있었을 때까지는 '여권신장' 혹은 '인권'에 대해 나름 관심이 있었다. 여대를 다녔고, 문학을 공부했으며, 영화에 뜻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라는 것은 썩 적당한 이유가 아닐지라도 이렇게나마 변명을 해본다. 하지만 지독스런 첫 사회생활을 2년 여 겪은 후, 내 안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것이 이 나라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에 사회전반에 대한 기대감도 사라졌다. 더불어 삶에 대한 애착이 사라졌다. 한마디로 난 강한 무기력증, 패배주의에 빠지고만 것이다. 책도 더 이상 보지 않으며, 뉴스도 잘 안 본다.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컨텐츠라고는 예능이나 유튜브, 웹툰만 보면서 머릿속을 한없이 가볍게 만들며 살고 있다.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인 것이다. 즉, 작금의 나는 '이 사건이 왜 정신병자 개인의 묻지마 살인이 아닌, 여혐인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무지몽매한 이들을 계몽시킬 팩트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는 더 멍청한 상태인 것이다! (물론 이런 중요한 사안에 대해 '꼭 따로 교육을 받아야만 아나?'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런 사안일수록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디가서 정성스런 궤변을 안 늘어놓으려면.) 고로 나는 같은 사회적 약자로서, 같은 여자로서 느끼는 막연한 분노와 감정적 동요를 걷어낸 채로 오직 팩트로만 그와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한 토론(이라기 보다는 계몽에 가깝겠지만)을 할 자신이 없었다.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앞섰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팽배한 피해자가 오히려 죄의식을 가져야한다는 병신같은 논리가 아닌, 나 개인 스스로의 무지함에 대한 부끄러움임을 다시금 강조한다.) 물론 내 남자친구가 정말 멋지고 자랑스럽게도 먼저 의식적인 발언으로 날 계몽시켜준다면 더할나위 없었겠지만, 애초에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이쪽에 대한 제대로된 교육따위 받아본 적도, 그럴 필요성 역시 느껴본 적 없었을 대한민국 남자기 때문에. 이것은 대한민국 남자 비하라기 보다는, 젠더에 관한 성숙한 토론 및 제대로된 교육환경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대한민국 그 자체에 대한 비난이다. 아무튼 길고 긴 (마찬가지로) 개소리였지만, 이것이 이렇게 나와 내 남자친구가 다른 이들처럼 화내거나 헤어지지 않은 이유다. 멍청이들끼리 참 잘도 만났다!(쑻)
3. 이 거지같은 변명 아닌 변명을 정성스럽게 늘어놓고 있는 이유는, 위에도 잠깐 언급했듯 오늘의 내가 너무 한심해서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엔 마음의 부채가 크게 느껴진다. 난 여태껏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당했을 위험한 순간들을 단 한번도 겪지 않고 운 좋게 살아남았다. (여전히 비겁한 변명이지만) 그랬기 때문에 곧바로 이 사안의 심각성에 대해 고민하려고 하지 않았던 걸 수도 있다. '여자이기 때문에 몸가짐을 단정히, 늦지 않게 일찍 일찍, 술은 적당히, 택시 타고 잠들면 안 됨 기타 등등'을 난 하나도 지키지 않는 삶을 살았다. 이에 대해 '왜 피해자가 조심해야 하나? 범죄를 일으키는 병신새끼들이 문제 아님? 이런 병신들이 활개를 못 치게 치안을 제대로 하는 게 사회가, 국가가 할 일 아님?'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저런 잔소리를 누군가에게는 한번쯤 하기도 했다. (프로내로불남이네.)
4. 다행스럽게도 많은 배우신 분들과 깨우친 분들이 일목요연하게 이 사태에 대해 정리해주신 글들이 많아 늦게나마 보고 공부하고 다시금 의식을 바로 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글들을 남자친구에게 전해줘야할지는 아직 고민이 된다. 그 순간 나도 싸움이 시작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이런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서는 일찍이 부모님과도 몇십 년동안 (진짜 말 그대로) 피 터지게 싸웠더랬다. 결국 내가 내린 답은 '포기하면 편해'였다. 그야말로 참담한 결론이지 않는가? 피를 나눈 가족조차,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은, 그래 줄 것만 같은 가족조차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과 주제는 항상 생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비롯한 앞으로 종종 떠오를 민감한 주제들에 대한 대화를 남자친구와 어떻게 나눠야할지 고민이다. 더불어 '과연 나는 앞으로 어떤 기준을 세우고 살아가고, 사람을 만나야 할까?'란 고민도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