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크코트
2012. 1. 11. 19:29ㆍ마음에남아
밍크코트 Jesus Hospital, 2011
연출 신아가, 이상철
황정민(현순), 한송희(수진), 김미향, 이종윤, 김남진, 백종우
따뜻하지만 잔인한 이름. 영화 <밍크코트>의 카피문구다. 하지만 이 말은 비단 '밍크코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부의 상징이자 탐욕의 상징이기도 한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가족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는 도입부터 예사롭지 않다. 핸드헬드와 클로즈업이 교차하며, 관객은 그저 불안한 시선으로 현순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다.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묵묵히 우유배달을 하던 그녀가 비로소 뒤도는 순간, 그녀가 온전히 얼굴을 보이는 바로 그 순간. 그녀(현순 또는 배우 그 자신)는 자신의 존재를 관객들에게 단번에 각인시킨다. 똑바로 마주하기 어려운 매서운 눈빛과 알듯 말듯한 미소, 생각보다 카랑카랑한 하이톤의 목소리로 잔뜩 긴장하고 있던 관객들에게 그대로 다가온다. 천천히 다정하게 설명조로 말을 건네는 것도 아니다. '아주 내성적인' 아주머니의 집에서 아무 말 없이 믹서기를 빼들고 나오듯, 그녀의 행동과 말투는 거침없다. 그저 그녀는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대로 말하고 움직일 뿐이다. 덕분에 관객은 처음부터 긴장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관객을 사건 속에 내던지고는 생각할 틈도 없이 빠르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나 곧 죽을 것 같다"라고 기도문을 외우듯 말하던 현순의 노모는 마치 유행어 가사처럼, 말하는 대로, 소원대로(?) 혹은 예언대로 몇 달 후 산소 호흡기를 낀 채 의식불명 상태가 되어버린다. 노모가 남긴 것은 겉만 번지르르한 삼 남매와 밍크코트 한 벌 뿐이다. 우리는 그녀가 왜 그런 상태가 되었는지 굳이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미 익히 들은 홍보 문구 중의 하나인 '안락사' 문제로 일어나는 가족 간의 충돌을 목격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영화를 보며 스스로도 깜짝 놀란 점은, 현순을 제외한 가족들의 계획이 성공할까 하는 호기심이 가장 먼저 일었다는 점이다. 은근 그들의 성공을 기원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영화 말미에 준호 처의 말처럼 "내 엄마" 였다면 절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지만.)
예상대로 각 인물들은 분명한 캐릭터를 가지고 충돌한다. 먼저 눈으로 보여지는 분명한 대비로, 현순의 언니와 남동생의 처는 밍크코트를 입고 있다. 반면 현순은 허름한 자켓 한 벌 뿐이다. 하지만 현순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 아랑곳 않고(그렇지 않은 척, 애써 신경쓰지 않는 척 하는 것이겠지만) 둘을 향해 조롱과 비난을 일삼는다. 물론 이런 상황이 오기까지의 많은 사건들이 있었겠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는 크게 궁금증을 가지지 않는다. 배우 황정민, 그녀의 존재만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단번에 이해하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가족이란 이름 안에서 행해지는 폭언과 멸시는 그 어떤 문제보다도 더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모두 가족 내 불화(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다툼들)를 한 번쯤은 경험해보았기 때문이다. 핏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고 보듬어야만 하는, 그러나 핏줄이므로 더욱 더 악랄하게 상처주고야 마는, 그런 악순환을 말이다. 현순의 가족 역시 겉으로는 매우 화목해보인다. 가족 이름으로 교회에 헌금을 하며, 주일마다 열심히 온 가족이 교회에 나감으로써 인정 받은 삶. 하지만 그 이면에는 품위를 지키기 위해, 남들에게 보여지고 인정받기 위해 가장 가까운 가족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속이고 상처주고 멸시했는지 영화 말미에 그대로 드러난다. 물론 이 모든 문제들은 '돈'에서 시작된다. 더불어 돈으로 고통받은 자들은 종교 안으로 더욱 파고들기 마련이다. 그 안으로 파고들어 도망쳐 안정을 갈구할 수록, 정작 눈앞의 문제는 더욱 더 겉잡을 수 없이 커질 뿐이다. 문제는 그럴수록 더욱 종교 안으로 도망치고 만다는 것이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긴장감 있게 달려나간 것에 비해, 끝으로 갈수록 어딘가 작위적이고 감정적으로만 흘러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건이 초반에 거의 다 터져버렸으니, 마지막은 울 일밖에 남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초반에는 은유로만 나타나던 밍크코트가 단번에 중심사건으로 떠오르면서 현순의 이단은 사건의 열쇠, 해결의 실마리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특히나 현순의 딸 수진의 행동변화가 그런 느낌을 줬다. 할머니-엄마(현순)-자신으로 이어지는 그리 녹록치 않은 삶의 무게를 인정하고, 가장 가까운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 가는 것. 그 결말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과정이 거칠어서 조금 아쉬웠다.
현순의 예언 아닌 예언들은 가족 간 고해성사의 장을 마련해준다. 이부분에서 나는 약간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나의 종교 성향은 무신론자에 가깝다. 종교는 개인의 자유지만, 개인적으로는 종교에만 맹목적으로 기대는 것만은 답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인지 현순의 가족들 모두가 내겐 하나의 이단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단이라고 정의하는 것 자체도 매우 이기적이고 오만한 것 아닌가. 세상에 내 종교는 옳고 남의 종교는 이단이다, 라고 말 하는 것 자체가.)
정작 내 힘으로 눈앞의 가족을 챙기지는 못하고, 어딘가에 있는 하늘나라 아버지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긴다니... 현순에게 극적인 상황들이 겹치고, 그녀가 도망치듯 옥상으로 올라와 하늘을 향해 허탈한 한숨을 내뱉을 때, 나는 그녀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녀의 벗겨진 모자, 얼굴을 스치던 눈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녀가 원망하면서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신이란 존재. 현순을 비롯한 그녀의 형제들 역시 신 앞에서 죄를 뉘우치는 것. 어떤 희생을 치름으로써 대가를 바라는 것. 거기다 현재 가족들에게 닥친 불행의 원인을 신의 뜻에 그대로 따르지 않은 자신이 탓으로 돌리는 모습까지. 그들은 마지막까지 자신들이 믿는 신이든, 이단의 말씀이든 어딘가에 매달리려고만 하고 있었다. 노모의 숨을 거두는 순간 역시 결국엔 신의 뜻이었다는 것 처럼 받아들이는 모습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들의 심정이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여서 그저 가슴이 한켠이 갑갑해졌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느님 아버지를 찾으며 울고 불고 난리를 치는 와중에도 아주 조용하고 평화롭게 진짜 그들의 어머니는 딸에게 딸을 남기고 조용히 어딘가로 떠날 뿐이었다. 그 마지막 한 장면에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찌보면 너무 뻔하기도 한 결말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결국 서로 다른 종교, 믿음따위. 무엇을 믿든, 어떤 신을 섬기든, 그들은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난 아이들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영화는 무척 흥미로웠다. 특히나 배우 황정민의 연기가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그녀로 인해 영화가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간단히 가족, 돈, 종교 그리고... 화해라고 정리하려고 보니, 아직은 잘 모르겠다. 노모와 수진의 그 짧은 대화만으로 영화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자만하기엔 아직 영화의 여운이 길다. 개봉한다면 다시 한 번 보고 더 많은 고민과 생각을 나누고 싶어지는 영화였다.
*위드블로그 캠페인을 통해 남기는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