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319 : 나이를 먹는다는 것

2018. 3. 19. 21:59숨죽인마음

0. 

한국에 돌아온 지 거진 한달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해외살이 여독을 푼다는 변명 앞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머리를 쓰지도,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그저 먹고 뒹구는 원초적인 일의 반복만 하면서도 뭐만 하면 쉽게 피로해져서 금방 다시 침대 위에 쓰러지고 만다. 그러면서도 자정이 넘어가면 괜시리 눈이 반짝반짝해져서 유튜브를 들쑤시고 다니느라 새벽 네다섯 시쯤에 잠드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엥? 이거 완전 개념 히키코모리아니냐? 차라리 미드라도 보면 죄책감이라도 좀 덜텐데 싶지만, 인간이란 뭐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아무것도 안 할 때 행복한 동물 아닌가. 아무튼 그렇게 그냥 뒹굴뒹굴, 남들 보기에 최고로 행복한 요즘을 보내고 있다. 더불어 살도 뒤룩뒤룩 찌고 있다. 그 좋아해 마지 않던 수영도 귀찮아서 못 가는 실정이라니... 정말 게으름이 극에 달하고 있다.


1. 

한국에 없던 일년 동안 딱히 내 신상에 많은 일이 있지도, 큰 변화가 있지도 않았다. 다만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고 이는 내 가족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큰 아버지가 올 초 식도암 3기 판정을 받으셨다. 캐나다에서 그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아이고 저런..."같은 반응정도밖엔. 어제 인사드릴 겸 오랜만에 얼굴을 봬니, '암'의 무서움을 몸소 다르게 느낄 수 있었다. 항암치료를 이제 막 시작하신 큰 아버지는 한껏 예민해져 계셨다. 안 그래도 예민하신 양반이었다. 그래도 손녀가 태어난 후로 데면데면한 어린 조카인 나와 내 동생에게도 어색하나마 말이라도 한 마디 더 건네주시고 전보다 유들해지셨다 느껴질만큼, 이게 세월의 힘인가 할 정도로 조금은 물러지셨더랬다. 그러나 그 근 십년 간의 행동변화들이 아주 무색해질만큼 지금은 그 전보다 더 예민해져 계셨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잠시잠깐의 고성에 머리가 멍해졌다. 그는 자신의 나약해진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으신 듯 했다. 이빨 빠진 호랑일지언정, 호랑이는 호랑이니까. 전같으면 마냥 무섭기만했을 그 어르신이, 이제는 세월의 무게 앞에 힘없이 스러져가는 것을 같이 보면서도 차마 못 본 척 해야할 것 같았다. 가망이 낮은 병 앞에 생일따위는 더 이상 축하하고픈 날이 아니었으리라. 불청객이 되어버린 우리가족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큰 아버지는 한 소리 크게 치고 안방으로 사라져버리셨다. 숨막히게 가라앉아버린, 홍철 없는 홍철팀마냥 주인공이 빠져버린 주인공의 생일축하 식사자리는 어찌어찌 부엌 한 켠에 마련되었다. 연신 무슨 화제든 꺼내 분위기 전환을 위해 노력하는 나의 고모와 아버지만은 부디 건강히 세상 즐기다 늦게 늦게 가시길 속으로 바랐다. 그러면서 문득 나와 남동생이 나이 먹어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 지 궁금해지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아직 나는 몰라도 된다.

대낮부터 이어진 고성에 지쳐 한 켠에 기대앉아 숨을 고르고 계시던 큰 어머니에게도 연민이 가득해졌다. 오랜 세월, 지금까지도 맏며느리의 무게를 짊어지고 젊을 적부터 어린 시동생들을 거둬먹여 서울에 뿌리내리게 한 그녀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장하다' 칭찬은 못할 망정 원망의 말을 던져 그녀 마음에 못질을 한 것은 나의 할머니였다고 한다. 지난 해 구정 큰 어머니는 평생을 짐을, 한을 이제서야 털어내듯 나와 어머니에게 토로했었다. 그 날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백 살을 바라보는 노모는 작은방에 멍한 눈빛으로 오도카니 앉아있을 따름이었다. 누구의 말마따나 팔자가 그래서인지, 큰 어머니는 노년에도 쉼없이 치매 노모의 부양까지 책임져야했다. 여태껏 무슨 일에도 꼿꼿이 버텨냈지만, 그리 길지 않던 그녀 노년의 평화는 결국 또 다시 깨져버렸다. 그녀는 누구를 원망해야할까. 점심 준비를 하면서 누군가는 들으라는 듯 외치던 "내가 무슨 팔자라 이 나이에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해!"란 말엔 그 누구도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어도 난 여전히 그 집안에서는 막내였고, 그러면서도 더 이상 세뱃돈 받을 어린애는 아니었기에 어서 결혼해서 '출가'하란 말을 근 오년간 지긋지긋하게 들어왔었다. 하지만 여전히 '출가'하지 못하고 이 집구석을 맴도는 나는, 과연 결혼을 한다 해도 속시원히 출가할 날이 올것인가란 의문이 스스로에게 들었다. 더불어 잔소리가 이날만큼은 크게 아프지 않았다. 역시 인간은 남의 불행으로 위안을 얻는 이기적인 동물이기에, 평소 진짜 내 걱정보다 본인들 고통의 무게가 더할테니, 오늘만큼은 맘껏 날 걱정하고 본인들 고통은 잊으시라고 아무말 않고 앉아있는게 나만의 위로였다.


2. 

큰 아버지의 생신기념도 기념이지만, 사실 이 날 가족회동을 한 이유는 할머니때문이었다. 남편의 항암치료가 길어지고 만일 수술까지 하게 된다면, 큰 어머니에겐 그의 뒷바라지와 더불어 치매 노모까지 돌볼 여력이 없는 게 당연지사였다. 아버지와 고모는 항상 마음의 빚처럼 할머니를 큰집에 모신다고 생각했기에, 이 기회를 빌어(?)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자고 했다. 우리집에서는 이미 내가 중학생 시절 한번 모시려다 실패한 저력이 있다. 그 시절 꼬장꼬장한 할머니가 더 이상 아닐지라도, 우리집엔 또 하나의 말 못할 사정이 있다. 아무튼 고모는 하루종일 집을 비우기 때문에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할 정도로 늙어버린 어머니를 밀착부양할 수 없어 내린 결정이었다. 나의 어머니가 우리동네에 시설이 잘 돼있는 요양원과 요양병원들을 돌아다니며 결정했고, 입원 동의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큰집에 온 것이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 모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특히나 안방에 들어가버리신 큰 아버지 모르게 해야하는 일이었다. 알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병든 그도, 역시나 하루하루 생기를 잃어가는 노모를 모시는 것도 결국은 큰 어머니 혼자인데도, 그의 독단과 자존심은 좀처럼 녹슬 생각을 안 했다. 

이번 구정 전까지만 해도 어른들은 멍하니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보며 그랬다. "정신이 온전하지만, 자식들 치고 받고 싸우는 것도 보기 싫고, 그냥 조용히 밥이나 얻어 먹기 위해 그냥 모른 척 입을 닫은 것"이라고. 분명 내가 느끼기에도 사오년 전의 할머니보다 작년의 할머니가 좀 더 정신을 차리신 것처럼 보였었다. 한창 할머니가 기력이 쇠하셨을 때는, 그야말로 알맹이가 쏙 빠져버린 쪼그라든 나무껍데기처럼 텅 빈 눈이어서 나도 몹시 충격이었다. 하지만 큰집에 적응하시고 밥도 다시 잘 챙겨드실 무렵부터는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매 주말마다 목욕시키러 오는 큰 딸, 나의 고모는 못 알아봐도 적어도 귀하고 귀한 우리 막내 아들, 나의 아버지만은 알아봤었다. 아버지 이름을 말할 때는 미소가 번졌더랬다. 그런데 이번 구정을 기점으로 그 마저도 놓아버린 할머니였다. 우리끼리 추측컨데, 아무도 할머니에게 귀뜸하지 않았지만, 일찍 세상을 떠버린 남편대신 의지하고 믿었던 큰 아들의 병세에 마지막 의지마저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 깔끔하시고 꼿꼿하시던 양반이 이젠 화장실도 혼자 못 가고, 하루종일 티비와 방 불을 켜놓은 채로 밤을 지샌다고 한다. 아버지는 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어머니가 나도 이제 못 알아봐. 나를 못 알아보는 건 정말 아무도 모른다는 건데." 이미 나중에 할머니를 어디에 모실지까지 다 상의를 마친, 마음의 준비를 마친 어른이 되어버린 아버지와 형제들이었지만, 하나뿐인 부모의 나이듦을, 세월 앞에 무력함을 목도하는 것은 모두에게 언제나 처음일테니 그 충격을 어찌 글로 옮길 수 있을까. 

한달 뒤면 요양원에서 할머니를 모시러 앰뷸런스를 큰집으로 보낼 예정이라고 한다. 고모는 이러는 편이 속 시원하고 잘 되었다, 고 하면서도 그 남은 한달만이라도 본인 곁에 두고 싶다고 했다. "아쉬워서..." 이제는 오빠같이 집안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는 나이가 된 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누나에게 "원래 가족이란건 서로 애틋하고 아쉬운 마음이 남아있을 때 가장 좋은 거야."라며 스스로를 달래었다. 

그 곁에 앉아 어른들의 대화를 듣던 나는 할머니의, 혹은 큰 아버지의 마지막 날을 생각해보려 했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중학생때의 치기어렸던 생각이 떠올랐다. 나의 어머니를 울렸던 할머니와 고모. 살면서 내 부모님은 단 한 번 부부싸움을 했는데, 그게 바로 그들때문이었다. 그땐 그들이 너무 미워서 난 결코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눈물따윈 흘리지 않을거라, 절대 슬프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울거나 슬퍼도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가 불쌍해서일 거라고. 여전히 나의 아버지의 슬픔에 잠긴 모습은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이번에는 그 작게 쪼그라들어버린 몸뚱이가, 단춧구멍만해진 눈에 텅 비어버린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집에 하나뿐이었던 손녀라고 아들들 틈바구니에서 나름 대접받던 나도, 항상 눈에 밟히고 아끼던 막내 아들의 딸이 이제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하시면서, 본인 앞에 놓여진 딸기를 자꾸만 내게 권하던 그 손짓이 안쓰럽고 안타까워서. 하지만 그런 날은 되도록이면 늦게 늦게 오길 바란다. 



3.

내가 다녔던 학교에 시끄러운 일이 생겼다. 한때는 존경받는 교수였던 인간이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져서도 끝까지 되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고 아집을 부리는 것에 할 말을 잃었다. 세상이 옳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을 끝까지 무시한 채 홀로 '고전적'으로 구는 것이 '인텔리'이고 진정한 문학인인가? 아니, 그저 꼰대다.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고인물은 썩는다. 그리고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도 썩는다. 시류에 따라 변화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강의 중에 담배를 태우고 여혐문학을 읽히며 "이 저능아들 총 쏴버린다"는 (파고들어가 보니 이보다 더 심했지만) 유우-머로, 세상을 이끌어갈 재능있는 어린 학생들의 시간을 낭비하던 그 틀딱에게 딱히 더 해줄 말은 없다. 재기나 하세요. 선생님에게 일말의 정도, 아니 없던 정까지도 다 떨어졌습니다. 마지막까지 내 잘못은 없다고 외치는 그 불통스러움에, 내가 저 양반 밑에서 배운 것은 없다 생각하긴 했지만, 소설 쓰고 싶다고 부랄발광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단 생각만 듭니다. 학년 초, 당신의 첫 평가덕에 저는 소설쓰기를 놔버렸거든요.

명예와 권력을 양 손에 꽉쥐고 지난 십 여년 간 맘껏 즐기니 세상이 어느 새 2018년이나 된 지도 몰랐나 보지? 멍청한 인간. 무슨 다시 작가로 돌아가, 누구 맘대로. 나무 아까워 안 돼 돌아가.

이제보니 그 옆에 허허실실 웃음이나 흘리고 나긋나긋 말하던 다른 양반들은 어떤 인간들이었을까 되돌아보게 된다. 그나마 내가 마지막까지 선생님이라 생각하고 좋아했던 그 양반들만은 아니었길, 바라지만 이 모든 것들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을 생각을 하니 같은 가해자가 아니고 뭔가 싶다. 내 책장에 꽂혀있는 그들의 책을 모두 내일 팔아버릴 작정이다. 중고로라도 누가 살 위인이 있을까 싶다만은.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나이를 먹기 마련이다. 어찌된 것이 그 끝이 아름다운 인간은 몇 없는 것 같아, 인간이란 원래 이렇게 추악한 것이였지 하고 되새길 뿐이다. 그 사실을 문학을 넘어서 본인 스스로의 삶으로 증명해 낸 발정난 늙은이에게 심심한 욕짓거리를 보낸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는 예쁘지도 딱히 붙임성이 좋거나 과 생활에 활발하지도 않아 그 늙은이 눈에 들지 않았지만, 다른 많은 피해학우들에게는 위로의 말을 전한다. 우리때만해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인지할 수조차 없는 무지한 시대였으므로. 시대가 이렇게 변하고 있음에, 모두가 소리낼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참거나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가해자들이 평생을 숨어살고 죗값 치루기가 고통스러워 결국 자살해버리는 세상에 박수친다. 그게 뭐? 피해자가 종용했나? 지들이 선택한 결과다. 그것이 올바른 세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