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그 동안 신변에 (나름)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블로그에 쓸라면 쓸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지만, 요즘 인생 최고 노잼시기에 무기력증이 엄청나게 겹쳐와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침대에서 벗어나는 일 조차도 내게 너무 힘든 일인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사고는 나름 많았네.) 원래 뽕에 막 차올랐을 때는 '따로 정성스레 감상문을 적어야지' 했지만, 그야말로 냄비처럼 식어버린 나의 열정 앞에 그 의욕은 삼일을 채 가지 못했다. 아무튼 그간 적지 못한 나의 근황을 간략하게나마 시간순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1. 이별1
드디어! 3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이 이렇게 허무하고 의미없이 정리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인생은 역시 드라마를 능가한다. 물론 한번의 이별이 있었지만, 정말 완벽한 이별을 했다. 감정이 줄줄 흐르고 눈물을 질질 짜는 그런 마지막의 마지막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첫이별 후엔 그 새끼를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론 내 탓도 하며 스스로를 검열하고 가스라이팅했다. 하지만 재결합 후 결국 너무나 명백하게 내 뒷통수를 쳐준 그 새끼덕분에 마지막은 정말 깔끔하게 감정정리할 수 있었다. 이젠 예전에 느꼈던 연민? 동정? 아쉬움? 애달픔? 다 좆까라 그래! 오직 분노와 짜증만 남았다. 지난 사진들을 완전히 삭제하면서 얼굴만 봐도 짜증이 치밀어 오름과 동시에 그래도 한편으로는 그 새끼가 부랄딸랑거린 덕분에 내 젊은 날 저런 곳도 갔고 이런 추억도 쌓았구나,,, 이런 경험치를 누적시켜준 그 개새끼에게 조금의 동정을 보내며... 남은 인생 영원히 조져버렸으면!^^ (첫이별 후 아련함이 남았을 땐 그래도 나보다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길 웅앵웅 초키포키 거렸는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존나 의미없다) 더불어 주변에서 장기간 연애 후 뒷통수 맞거나 존나 허무하게 헤어진 지인들과 이야기하며 나눈 결과는 : 남자 좆까ㅗ 비혼비출산비연애! 존나 나와 내 피를 나눈 가족, 그리고 맘맞는 죽마고우들과 영원히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거야~ 이미 그러고 있고~
2-1. 이별2
2018년 정말 내 인생 최악의 해라 말 할 수 있을 만큼 나를 비롯해 내 주변인들 모두에게 최악의 일들만 벌어지고 있다.
예상치 못한 어느날 새벽, 큰아버지의 부고를 듣게 되었다. 너무 쉽게, 그렇게 가셨다.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아직 완전히 돌아가신 것은 아니지만 호흡기는 뗐다는 말을 듣고) 병원 응급실로 향했지만 이미 고인이 되신 후였다. 나는 차마 큰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뵙지 못했다. 침대를 둘러싼 커튼을 젖히고 한걸음 더 가까이 가면 뵐 수 있는 거리였지만, 큰아버지 마지막 보습을 그것으로 남기고 기억할 자신이 없었다. 그 이른 아침의 분주함과 누구도 제대로 울지도, 말을 잇지도 못하던 그 먹먹한 공기... 정말이지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큰어머니는 전날에만 병원에 갔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며 자책했다. 하지만 모든 후회와 원망은 이젠 의미없는 외침일 뿐이었다. 그 누구의 탓도 잘못도 아님은 분명했다.
큰아버지는 주무시다 일어나서 옷까지 다 갖춰입으시고는 새벽에 병원에 가야겠다고 큰어머니를 깨우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집 현관문을 나서기도 전에 거실 바닥에서 쓰러지셨다. 집안에서 쓰러지셨기 때문에 경찰이 왔고, 보험금 내역이나 기타 타살의 흔적 등이 없는지 조사 후에 큰아버지는 장례식장으로 옮겨지실 수 있었다. 이성과 감정 사이 혼란함만 더욱 가득해졌다.
아빠가 젊을 적, 오래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처음으로 가까운 친지 중 한 분을 잃은 슬픔과 고통은 그 누구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집안과 다르게 유달리 육촌에 팔촌 등 먼 친척들도 잘 모이는 이 집안의 특이점은 이런 때에 빛을 발했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어딘가 반쯤 죽음의 그림자에 먹혀있는 집안처럼, 죽음과 대비되는 젊음, 삶의 생생한 공기는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마냥. 이 곳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나였으니 말 다 했지. 이틀 내내 자리 보전하고 지난 과거추억에 빠진 어른들 덕분에 집안 행사 아닌 행사를 무리없이 잘 진행시키기 위해 따로 슬퍼할 시간도 없이 고군부투하는 이는 오직 그의 외아들이자 집안의 하나뿐인 장손 사촌오빠 뿐이었다. 물론 그 곁엔 내 아버지가 묵묵히 뒷바침을 해주고는 있었지만, 아버지와 형의 무게가 같을까. 어쨌거나 상주들은 마냥 슬퍼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어서 차근차근 다음 스텝을 밟아나가야 했다. 내게도 앉아서 슬퍼할 여유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물론 삼일장을 다 지키고 있는 나를 좀 의아하게 보는 이도 있었지만, 내게도 큰아버지는 뵌 적 없는 할아버지 대신이기도 했다. 항상 무섭고 큰 어른이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때마다 안부를 물어주시고 용돈을 챙겨주셨던 (무려 이번 추석까지...) 큰아버지께 난 무슨 보답도 한번 제대로 못했다는 사실이 가슴 한켠에 큰 짐으로 남았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보답이 되고 싶었다. 이것은 사실 고인을 위한 것이라기보단 나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에 가깝지만.
국가유공자신 큰아버지는 시설이 좋은 보훈병원에서 상을 치루시고, 대전 현충원에 잠드셨다. 살아생전 보훈병원 장례식장만 가보시고, 저기서 내 장례를 치뤄달라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그 기분이 어떠셨을지 차마 짐작조차 어렵다. 다만, 장례식장은 정말 시설이 괜찮았고 그것이 남은 가족들에게 위안이 되었다. 서울 현충원은 부지 부족으로 납골묘가 아닌, 납골당밖에 자리가 없다 하여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 현충원에 가기 전, 근처 화장터에서 화장을 하며 다시 한번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실감했다. 이제 정말, 고인은 가셨다. 이 세상에 우리가 기억하는 모습의 고인은 없는 것이었다. 그때 한번 더 어른들의 눈물을 마주하며 나도 울 수 밖에 없었다. 편히 쉬세요, 큰아버지.
대전 현충원은 아주 넓고, 상상 이상으로 빽빽하게 비석이 자리잡고 있었다. 과연 저 중에 내 가족의 자리를 어떻게 찾아가나, 그 앞에서 절은 할 수 있으려나 의구심이 들었다. 다행히 날이 아주 맑은 가을 어느 날이었고, 단풍이 아주 아름다웠다. 열 가구의 합동 위령제 후, 버스를 타고 더 올라가 큰아버지에게 할당된 가묘 구역으로 갈 수 있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위령제때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답게 4개 종교인들이 나와 위로를 해주었는데, 열 명의 고인들 친지들이 각자 자기네 방식으로 고인을 위로하는 방식 또한 다이내믹 코리아였다. 어디서는 기도를 하고, 울고, 제사를 지내고, 예불을 드리고... 우리도 우리들 나름의 방식으로 (불교, 기독교가 합쳐진 정말이지 대통합의 시간이었다) 고인을 보내드렸다. 햇살이 너무 따가울 정도여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이곳의 평화로움과 가을의 아름다운 풍광을 큰아버지도 보고 가셨으면 더 좋았을텐데. 그래도 볕이 잘 드는 곳이라 다행이었다. 어쩐지 이 모든게 큰아버지 다우시단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그랬다. 그 성격에 아픈 모습 오래 보이기 싫어서 이렇게 서둘러 가신 것 같다고. 그렇게 마지막 의식까지 끝내고 함께 타고 온 버스에 실려서울로 돌아왔다. 장례식장에서대여했던 상복을 반납하고, 그렇게 다시 각자 현실로 돌아가는가 싶었다.
2-2. 이별3
큰아버지의 삼오제를 치루고 다들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맥이 빠져있을 때였다.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께 아무도 찾아가지 못한 시간이 약 5일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주 주말에 당숙어른들이 할머니를 찾아뵙고,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촌오빠도 다녀갔다고 했다. 내 엄마는 몸살이 났고, 아버지는 밀린 회사일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별 하는 일도 없었건만 타고난 저질체력이라 심신이 지쳤던 나 역시 주말까지만 쉬고 월요일에 할머니를 뵈러갈 참이었다. 아빠는 본인 어머니가 철창없는 감옥에 갇힌 모습을 차마 감당할 용기가, 스스로의 불효를 용서할 수 없어 자주 찾아뵙지 않았다. 대신에 주말에 큰집에 들러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미리 받아왔다. 고모들은 주말 저녁 찾아가 싫은 소리를 또 잔뜩하고 갔다고 했다. 어르신 고통스럽게 하는 콧줄이니, 링겔이니 다 그만두라는 매번 하는 잔소리였다. 살만큼 사신 노인네 차라리 편히 돌아가시게 두라는, 내가 듣기엔 안 그래도 기력없는 분을 아사시키라는 소리로 들렸지만, 모르겠다. 자식들의 마음은 또 다를 수 있겠지. 아무튼 최종 결정권자는 현재 보호자인 내 부모님이었기에 고모들의 말을 그동안도 듣지 않았었다.
큰아버지 보내드린 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은, 그 난리통 후인 월요일 아침, 또 다시 부고 전화로 난 눈을 뜨게 되었다. 할머니가 위급하다는 전화에 엄마가 먼저 출발했고, 아빠가 날 깨워 뒤따라 갔다. 요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간발의 차로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였다. 정말이지 그날 아침은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왜 우리가족에게 이런 비극이 연이어 또 일어나는 걸까. 할머니, 이렇게 가시면 어떡해요... 할머니를 원망할 일은 아니었지만, 너무 야속했다. 조금만 힘내주셨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큰아버지 상을 치루면서 우스갯소리로, 할머니는 워낙 정신력이 강하신 양반이라 100살까지도 사실 양반이라고 어른들이 그랬었다. 그러나 역시 말하지 않아도, 느끼셨던 것이겠지. 큰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부터 열이 나고 상태가 안 좋아지셨다던 할머니는 결국 고비를 넘기지 못하셨다.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에서 근처 대학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기기 위해 앰뷸런스를 불렀다. 뻣뻣하게 굳어가는 몸을 이동식 침대에 옮기던 모습, 상가건물이기 때문에 행여나 행인들을 놀라게 할까 아프신 듯한 모습으로 옮기던 것... 지금은 그 모든 순간들이 사진처럼 내게 각인되어 있다.
월요일 아침, 가족 모두가 넋이 나간 상태로 다시 모였다. 심지어 큰어머니는 큰아버지 초상 이후 제대로 집에 돌아가 잠을 청하지도 못하신 상태였다. 이번에는 내 아빠가 걱정이었다. 아빠는 전날 불면증으로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던 터였다. 모두가 최악의 컨디션에서 또 한번 같은 일을 해내야만 했다. 요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셨기 때문에 경찰은 오지 않았다. 병원에 사망진단서를 요청하고, 멍하니 앉아 대기를 하면서도 장례식장에서 이것저것 계약서를 체결해야 했다. 상조회사에 연락을 취하고, 처음 계약 조항과 현재 원하는 바가 맞지 않아 한차례 신경전이 벌어져야 했다. 나 역시도 슬퍼할 겨를 없이 아빠와 엄마를 챙기고 지난번에 이어 또 같은 업무를 맡았다. 장례식장 입구로 화환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좁은 입구에 빽빽하게 재정렬 시키고 서명을 하는 것도, 조문객 접대용 음식을 컨펌하고 영수증에 서명을 하는 것도 일이었다. 큰아버지때와 달리 이번엔 비바람이 몰아치고 하늘이 아주 시커매졌다.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만, 그냥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아직 마음이 다 준비되신 게 아닌데 가신 것은 아닐까. 큰아버지가 마중나오셨던 건가, 싶었다. 모두가 반쯤 더 넋이 나간 상태로 (그러나 이번엔 다들 울 힘도 남지 않은 듯 했다) 또 다시 지난 주에 맞았던 조문객들을 맞았다. 나까지 친척들의 조문객 얼굴을 외울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따로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내 친구도 찾아와줘서 정말 고마웠다. 왜 사람이 기쁜일보다 슬픈일에 더 주변인을 챙겨야하는가 느꼈다. 저녁 때는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상주가 상주인지라, 내 부모님의 손님들과 고모들의 손님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다들 퇴근 후 찾아와주셔서 온갖 상상 이상의 일들까지 부차적으로 벌어져 지금 이게 정말 영환지 시트콤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누군가는 명품 신발을 잃어버렸고, 노숙자까지 들어와 한상을 받아갔다. 거기다 사람이 밀리고 밀리는 와중에 한 종교단체에서 약 한 시간 가량 기도를 해주느라, 결국 절도 못 하고 집에 돌아가는 조문객들도 발생했다. 종교를 안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번 계기로 종교를 더 극혐하게 되었다. 고인과 유족을 위해 좋은 마음으로 찾아와주신 건 너무 고맙지만 낄끼빠빠 모르시나요?(할많하않)
이런 온갖 일들을 다 겪고,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서울로 상경하신 뒤 한번도 찾아가지 못하셨던 고향이었다. 나도 어릴 때 이후 처음 내려가는 산소와 시골집의 변한 풍경에 마음이 저릿해졌다. 이 긴 시간동안 '다음에'란 말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미루고 놓쳐왔던가. 내 아빠는 고향 길목에 있던 화장터에서 오랫동안 우셨다. 할머니의 영정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시는 모습에 나도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어릴 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나도 눈물이 날까? 아마 아빠는 펑펑우실텐데, 나는 안 울면 불효녀 소리 듣겠지, 어쩐다? 이런 바보같은 어린 생각을 했었다. 나도 할머니가 영영 세상에서 사라지실 때, 할머니의 그간 고생한 세월이, 그에 비해 너무 초라했던 말로가 가슴 아파 울었다. 그리고 내 부모님의 눈물 앞에선 나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쇤, 이젠 본인 어머니와 더 가까워져가는 나이의 내 부모님이 조금이나마 마음 편히 울고, 조금이나마 덜 아파하시길 바라고 바랐다. 할머니 곁에 이런 든든한 아들이 있었듯, 내가 조금이나마 부모님의 곁을 지켜드리고 위안이 되어 드릴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하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장지에 도착하니 다행히 날은 아주 좋았다. 가을 들녘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곳은 내 고조할아버지부터 할아버지까지 잠들어 계신 곳이었다. 이번을 계기로 봉분을 없애고 전부 수목장으로 바꾸었다. 차례차례 고운 흙을 할아버지와 할머니 위에 뿌려 드렸다. 할머니께 살아생전 고생하신 것 이상으로 고향에서 영면하시란 위로와 함께 남은 가족들의 안녕을 보살펴달라고 빌었다. 마지막까지 할머니께 바라는 것밖에 없는, 이기적인 손녀였다. 할머니, 내 몸 조금 피곤하단 이유로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못 찾아뵈서 너무 죄송해요. 할머니 편찮으실 때도 아빠가 슬퍼하고 힘드니까 지금 돌아가시면 안 된다고, 버텨달라고 해서 죄송해요. 언제쯤 저도 다 크고 철이 들까요. 할머니, 정말 편히 쉬세요. 고생 많으셨어요. 할머니가 아끼는 막내 아들, 다른 친척어른들까지 저도 이제 더 열심히 챙길게요. 걱정마시고 편히 마음껏 자유롭게 천국에서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시고 행복하세요. 큰아버지랑도 웃으면서 오래오래 잘 지내고 계세요.
2-3. 이번 일을 통해 느낀 점
막상 상을 치루고 일을 하려다보니, (알고는 있었지만) 이 유교의 나라는 역시 중요한 일엔 남자만 사람 취급을 했다. 일을 시키려고 보니, 내 사촌들은 다 외동아들인데도 바빠서 제때 못오는 인간들이 더 많았다. 덕분에 내가 처음으로 부조금 정리를 맡아야 했다. 아들이 가득한 집안에서 첫손녀로 태어나 나름 내 또래의 다른 여자아이들보다는 음식준비나 남자들 시중 등 힘든 일이나 구박은 겪지 않고 자랐지만, 동시에 "네가 아들이었어야 하는데"라는 말(아들밖에 없어도 아들 못 잃어~~~)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더랬다. 이번에도 어른들엔 사람이 없어 내게 그 일을 맡기면서도 영 미덥지 못한듯 오며가며 한마디씩 내게 거들었는데, 그걸 듣고 있는 사람은 오조오억번 같은 소리 또는 다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아 어쩌란 말이냐 트위스트추면서~~가 절로 나왔다. 고인을 추모하고 슬퍼할 시간은 내겐 충분치 않았다. 그저 무거운 마음으로 내가 맡은 막중한 업무를 문제없이 잘 핸들링하는데에도 힘이 부쳤다. 그런 와중에 또 어떤 개저씨가 "여기에 왜 여자가 앉아있어?"라고 말하며 등장해서 ㅎ ㅏ ㅅㅣ발ㅋㅋㅋㅋ... 상복입고 초상 한 번 더 치룰 뻔했다.
심지어 큰아버지 때는, 상주인 사촌오빠가 잘못된 디렉션을 주는 바람에 헛발질도 꽤 했다. 그는 한번도 이런 업무를 할 일이 없었지만, 어디서 보고 들은 것은 많아서였는지 내게 쓸데없는 부가적인 업무까지 줬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정말이지 아무짝에 쓸모없는 노동이었다. 덕분에 조문객들에게 애꿎은 욕까지 얻어먹을 뻔 했다.(이래서 일머리 없는 사람이 상사면.... 어후 골치) 아무튼 결국 큰아버지와 할머니 상 모두 부조금 내역 정리와 (이 업무를 통해 어른들의 사회생활의 빛과 그림자를 또 체감하고...) 정산을 내가 도맡아 하면서 내 적성을 새롭게 찾아가고... (이와중에 자격증 시험 합격한거 실화냐;_;ㅋㅋㅋㅋ 천직인듯?) 아무튼 결국 모든것은 돈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씁쓸하지만. 심지어 내 능력은 그 사이 업그레이드 되어서 할머니 때는 아직도 노트에 손수 필기하고 카카오톡 메시지 보내기도 힘에 부쳐하시는 어르신들께 21세기 업무의 꽃! 눈부신 엑셀의 아름다움을 보여드리고 칭찬까지 들었다.(이제 일일이 계산기 두드리는 시기는 지났읍니다,,, 우리에겐 SUM이 있읍니다,,,!)
아무튼 이번 애경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당장 상조업체에 입사해도 될 만큼;; 그리고 아주아주아주 먼훗날, 나는 도저히 인간관계가 여기서 더 늘어날 것 같지 않으니 이런 성대한(?) 장례는 치루지 못해 내 부모님 가시는 길 더 슬퍼질 것 같은 그런 유머 아닌 유머도 남겨볻다. 누군가 그랬지, 결혼은 부모의 손님잔치고 장례는 자식의 손님잔치라고. 그 말이 정말 맞는 말이었다. 허나 그 와중에 가장 남는 것은 어찌되었건 가족, 친지였다. 위에서 정작 쓸려면 쓸모없는 아들놈들이라고 욕했지만, 어쨌거나 늦게나마 찾아온 사촌오빠들이 있어 조금은 든든했다. 더 웃긴건, 이번을 통해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다는 걸 확 체감했다. 나 어릴 때는 사촌들과 나이차가 많이 나서 (아빠가 막내라, 심지어 아빠와 사촌오빠 나이차가 덜 난다;;) 항상 데면데면하고 어릴 적(난 기억에도 없는;) 나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친한척하는 사촌오빠들이 항상 어려웠다. 그러나 이번에 연 이주를 같이 붙어서 틈틈이 이야기하다 보니, 나도 나름 사회생활 스킬이 늘고 이젠 비슷한 청년층이 되다보니 이야기가 잘 통했다. 심지어는 몇십년 만에 본 사촌오빠랑도 막 어제 본 듯이 얘기하고 밥먹는 나 자신을 보고 소오름;;ㅋㅋㅋ 그와중에 또 예비 며느리 1을 보면서, 속으로 "왜?..."라고 묻기도 하고ㅎ
아무튼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인 덕분인지 친척들 사이에서 내 평판은 조금 올라갔다. 내 부모님의 평판에도 도움이 되었길. 결국 이 또한 사회생활인 것이다.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책잡힐 일은 없어야 했다. 삼일장을 치루고 삼오제에 가기 전, 직계가족들에게 나눠줄 조문객 리스트를 빠르게 정리해야 했다. (공무원들은 답례품을 나눠줘야 한다고 한다. 덕분에 사촌오빠는 큰아버지때 오신 분들 답례품 포장하다가 할머니 부고를 또 듣고 그 일을 또 하게 되었고...) 최종으로 아빠에게 리스트 컨펌을 받으며, 이 모든 고인을 위로하기 위한 예절과 허례허식 그 사이 어딘가쯤에서 고통받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깨닫게 되었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삼일장이 과연 적합한가? 외국처럼 딱 하루 장례식날 모여서 고인을 추모하면 되지 않는가? 이틀 내내 상주가 계속 절하는 것도 고문이지 않나? 하지만 그렇다고 또 내 부모님, 할머니만 삼일장 안 하고 간략하게 하자고 하면 마음이 좋지 않을 게 뻔하고... 과연 시간이 더 흐르면 간소하게 바뀔 것인가? 상조회사들이 이를 가만 두지 않으려나? 뭐 이런 저런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었다.
2-4. 조문갈 때 TMI
1) 누구 조문객으로 왔는지 밝히면 좋다.
: 상주가 한명일지라도, 고인의 딸이라던지 사위라던지 직계가족들의 손님들도 다양하게 많이들 오시므로... 내가 조문객에게 물어봤을 때, 어떤 개저씨2는 "여기 상주 한명 아냐?"라는ㅋㅋㅋㅋㅋ...존나 나만 사는 세상같은 발언을 해서 날 또 빡치게 함. 부디 내 아빠가 어디가서 저런 개념상실한 말은 안 하고 다니시길 바라고 바랄뿐.
2) 방명록 또는 부조금 봉투에 본인의 소속 또는 상주명(나 자신이 찾아온 유가족명)을 적어두면 좋다.
: 세상엔 동명이인이 꽤 많습니다. 너무 이해타산적일지라도, 본인이 나중에 돌려받고 싶으시다면 필수로 기입해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3) 옷은 너무 화려하지만 않으면 굳이 검은색 아니어도 상관 없다.
: 유가족 중 그 누구도 신경쓸 겨를이 없다.
라고, 내가 다른 애경사에 갔을때 조심하려고 정리해봤다.
3. H.O.T. 콘서트
콘서트 다녀와서 한껏 뽕에 차올라서 자세하게 내가 그들과 얼마나 추억이 있고, 이번 콘서트 어땠고 저쨌고 쓰고 싶었으나, 지금은 기력이 다하였다. 다녀와서 너무 좋았고, 오랜만에 추억에 잠길 수 있어서 행복했다. 특히나 마흔줄이 다 되어서도 예전만큼 기량을 보여줘서 고마웠다. 다들 정말 힘들었을텐데 고생많았다, 고맙다. 간략하게 적자면, H.O.T.가 얼마나 대단한, 진짜배기 아이돌인지 다시 느꼈다. 트레이닝따위 없던 시절에 뿅하고 나타나서 지금 들어도 개띵곡들 만들고 춤추고 부르다니! 심지어 그 노래들이 주는 사회적 메시지가 여전히 통한다는 사실이 슬프고 절망적이지만. 없다! 없다! 외치며, 내가 세상의 미래다!라고 보란듯이 다른 어른이 될테야!했지만, 이젠 다들 그저 그런 어른이 되어버린 사실도 슬프기 짝이 없었다.
아무튼 강타는 정말 미모도 미쳤고, 성대가 여전하기는 커녕 더 업그레이드되었더라. 뮤지컬까지 겸하느라 창법도 더 발전해서 '열맞춰' Rock 버전에서는 정말 빛이났다.(낮에 뮤지컬하고 온 사람 맞냐고? 성대 기계인듯?ㅠㅠ) 심지어 최애 솔로곡 중 하나를 또 불러주다니,,, 이분 팬잘알ㅠㅠ 본투비 아이돌~~!!! 문희준은 솔까 개인 문희준은 (솔콘과 결혼 등 골수팬들이 등돌린 이슈도 많고) 싫지만, 에쵸티 리더 문희준은 여전히 여전해서 좋았다. 이제 몸이 마음만큼 안 따라주는 모습이 슬펐지만,,, 그래도 이제와 보니 정말 이 사람 노래, 랩이면 노래, 랩, 춤이면 춤, 작곡이면 작곡 참 다재다능한 사람이구나 새삼 느낌. 진짜 온갖 재능 다 갖다 몰빵해서 너무 빨리 몰락해버린 인간인가,,, 싶기도 하고. (물론 다른 약쟁이나 성범죄자 등에 비하면 아무런 일도 없는 클린한 사람이지만ㅋㅋㅋㅋㅋ) 장우혁도 현존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멤버 중 하나인데, 분홍머리 미쳤냐고,,,! 거기다 몸도 제일 역시 날쎈데, 현역 시절보다 입도 많이 풀렸는지 첫날에는 쿨워터 소리 또 해서 갑분싸...(어빠 그런건 그냥 팬들끼리 음지에서 우리끼리 말하고 놀 때 좋은거거든여?;;; 본체가 알아버리는 별로거든여?;;; 하하버스 몰라여?;;; 본인은 본인이 존잘인거 몰라야 존잼이라구여~~!!!!!;;;;;) 해버렸지만, 막콘에서는 그런 소리 안 했던 거 보니 첫날엔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던걸로^^; 그냥 허구속의 팬들을 향해 대본대로 기계적으로 떠들었던걸로^^; 솔까 솔로무대 곡 초이스는 나에게는 걍 그랬지만 (에쵸티에서 더 나아가 발전하고 있는, 여전히 살아있는 현재진행형 아티스트 장우혁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겠지만, 그럴거면 토니처럼 아예 새곡이나...) 그래도 '환희'로 죽여줬으니까 됐읍니다,,, 거기다 장뿌엥~~~~~ㅠㅠㅠ,,, 살면서 저렇게 우는 장우혁 볼 줄 누가 알았냐~~~~ㅠㅠㅠㅠㅠㅠㅠ 어빠 까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두올다이 이런거 해주길 바랐는데 안 해줘서 살짝 앙탈 부려봤어여ㅠㅠ 어빠들 하고싶은거 다 해!!ㅠㅠ 토니는, 한때는 안승호라고 부르는게 더 익숙했는데 이젠 토니,,,가 더 익숙하고요ㅠㅠㅋㅋㅋㅋㅋ 암튼 그래도 다섯명 중 씹덕 외엔 가수로서 별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에쵸티는 에쵸티였다... 외국어랩b 심지어 가창력도 더 늘은거 같아;;; 솔까 센스는 좋은데 본인이 가진 능력이 그만치 못따라줘서 좀 아쉬운 아픈 손가락ㅋㅋㅋ이었는데 핫나잇~~~ 안죽었고요?? 사업도 잘하시고, 여전히 귀여우시고, 아무 문제없이 다들 잘 늙어주고 있어서 감사합니다S2 이재원은 사실 진짜 에쵸티때는 샤이가이에서 5집때는 막내온탑 카리스마 절정 찍다가 확 꼬꾸라져버려서 안타깝기도 하고, 가장 기대가 안 됐는데, 그래도 역시 에쵸티는 에쵸티다222 제일 팬들과 비슷한 포지션에서 감격을 많이 하고 가신거 같아서 보기 좋았고요?ㅜㅜ,,, 그러나 어릴적 유갓건~ 부르다가 이젠 DJ 하는 그의 음악적 행보는 저에겐 아직 낯선 것,,,
콘서트 진행관해서는 할말이 많지만 이젠 뭐 과거고... 내년에 또 콘서트를 해준다면 너무너무너무 고마울듯. 그때는 꼭 올콘! 이번에는 애경사가 겹쳐서 올콘하진 못했지만, 희극과 비극이 공존했던 나의 시월,,, 정말이지 #고미사영#foreverH.O.T. 저작권 관련해서 ㄱㄱㅇ이 존나 비열하게 구는 거 같던데, 뭐 H.O.T.든 뭐든 이름이 중요하랴. 다섯이 다시 했다는 것에, 그 무대가 변함없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4. 뮤지컬 매디슨카운티의 다리
강타뽕에 취해서 부리나케 예매해서 막공이 오기 전에 봤다. 솔직히 이런 잔잔한(?) 로맨스물은 내 취향이 아닌데, 순전히 그냥 빠심에 차올라 봤더니 나쁘지 않았다. 내로남불,,,ㅎ 뮤덕 짬 좀 찼지만, 역시 내 어빠의 키스씬과 침대씬은 조금 두려운 것,,,ㅎ 행여 관크할까 친구 손 꼭 붙잡고 내적비명 지르며 보았다. 중간중간 노출씬도 감사했고요,,, 그나저나 어빠 허리,,, 아무튼 가수 강타때의 반짝반짝 화려함과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뮤배(라고 부르기엔 아직 어색하지만) 강타, 랭버트의 모습 또한 나쁘지 않았다. 시대 배경도 옛날이고 그래서 오히려 덜 어색하게 볼 수 있었던 듯. 나중에 차프란과 듀엣할 때는 살~짝 힘이 부치기도 했지만 뭐 워낙 차프란이 짱짱하시니ㅠ 랭버트 미성이 너무 좋아서 극 내내 행복했습니다,,,
암튼 프란체스카가 끝까지 다시 로버트를 안 찾아서 다행이었다. 로버트는 너무 불쌍하지만, 어떻게 단 한번의 짧은 사랑의 추억을 가지고 평생을 버틸 수 있는지도... 좀 나로서는 이해불가였지만, 그게 또 아름다운 지점일테니까! 역시 이런 로맨스극은 나랑 안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