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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8. 00:52숨죽인마음

요즘엔 언제나 그를 은연 중에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귤을 꺼냈다. 밤에 하는 오락프로그램을 보며 까먹기 위해. 네 개를 주섬주섬 챙겨 거실에 나와 앉았다. 엉덩이를 채 대기도 전에, 하나만 먹으라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발끈했다. 아빠는 그런 식의 농담을 즐기는 것일까. 언제나 깨닫는 사실. 나랑 맞지 않는, 과연 이토록 내가 좋아하지 않는 요소 요소들을 다 갖춘 이가 어디 있을까, 미처 그런 사람의 존재 유무 자체도 생각지 않았는데, 정신차리고 보면 여기 있다. 바로 아주 가까운 내 옆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취향 하나 맞는 게 없고, 하나 통하는게 없다. 재미있는 사실이다. 아무튼, 빈정 상하게 하는 농담의 일 인자. 하지만 이런 류의 농담을 다른 이가 했다면 딱히 빈정 상하지 않고 넘길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나도 똑같이 빈정 상하는 농담으로 받아치면, 상대가 받아줘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농담은 농담으로 성립되니까. 하지만 아빠가 그런 식의 농담을 먼저 던졌을 때, 나 역시 같은 류의 농담으로 응하면 아빠는 돌변한다.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고 욕한다. 넌 진짜 나쁜 년이야. 이젠 눈물도 안 나고, 딱히 크게 분노하지도 않는다. 그냥, 며칠 잠잠하다 했다... 정도? 그래도 순간의 분은 못 이겨 귤을 내던졌다. 비닐봉지에서 귤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넌 손도 대지마. 순간, 머리 속으로는 알았어 그럼 발 댈께 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농담할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그냥 조용히 닥치고 냉장고에 쳐박아 두었다. 귤. 부모자식 간에 무슨 이유를 갖다 붙이겠는가. 날 존재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난 그들에게 평생을 효도하며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난 자식을 절대 낳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크길 바래서도 안 되는 게 자식이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결정적으로, 세상에 별로 나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더욱 구차한 사실은 난 그럼에도 이 집에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배짱도 돈도 아무것도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나가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다. 이 좋은 환경에서 뭣하러 내 발로 나가. 그래서 아빠의 등골은 더욱 휘고, 흰머리는 늘어만 가는 것이지만. 아무튼 친절하지 못한 이에겐 마찬가지로 불친절로 대하는 나의 습성은 고쳐야 마땅하겠지만, 내가 아직 철이 덜 들고, 고생을 덜 해봐서 그러려니. 이해해주십사. 언제까지 이해해야해? 라고 되물으면 글쎄. 그것이 바로 부모의 업보 아니겠습니까, 라고 시건방지게. 다시 봐도 난 정말 나쁜 년이야. 다시 한 번 귤. 귤을 까먹다가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내 얘기는 할 틈도 주지 않는 사람이므로, 그냥 전화를 끊고 다시 귤을 찾아 먹었다. 네가 좋아하는 귤을 나도 먹고 있었어, 따위의 말을 해봤자, 그건 그냥 먼지만도 못한 무의미한 말이었을테니까. 다 내려놓기로 한 순간, 그것을 인정하고 공표한 순간, 또 다시 초조해지는 건 무슨 심리지? 난 정말 사람 속에서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어. [01:36] 잠을 청하려는 순간, 연락이 왔다. 나 이제 집에 들어가, 자? 우리가 무슨 사이이길래 이렇게 성실히도 보고를 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무슨 사이이길래 난 그의 연락을 기다렸는가. 하지만 난 당장 그의 연락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물론 우리가 무슨 사이이길래 내가 그의 늦은 연락에 화를 내냐만은. 연락이 늦어서 화가 났다기보다, 여전히 문제는 귤 때문이었다. 귤은 그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아무튼. 나는 결국 주방으로 나갔다. 먹다 남은 와인이 있었고, 어디선가 주워온 마음에 썩 드는 유리잔이 있었다. 집에서 음주를 한 기억은 별로 없다. 혼자 술 마시는 청승맞은 짓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잔을 손에 쥐었고, 허접한 고무 마개를 열었다. 싸구려 와인은 그럭저럭 마실만 했다. 사실 와인 맛도 잘 모르면서. 그냥 분에 못 이겨 술을 찾았다. 왜 사람은 화가 나고 속이 상하고 슬프고 하다못해 기뻐도 술을 찾나? 어? 내가 담배를 안 하기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벌써 집 나가서 아마 한 갑은 다 폈을거다. 자랑은 아니지만. 대충 분에 못 이겨 와인을 한 잔 마시고 결국 귤을 까먹었다. 보란 듯이 예쁘게 꽃 모양으로 까서 싱크대 중앙에 잘 펼쳐 놓았다. 그리고 차인표 못지 않은 분노로 마구 씹어댔다. 시발. 귤 존나 다네. 하우스 감귤이야. 귤을 마구 씹어 삼키고 있는데, 눈 앞에 두유 한 팩이 보였다. 두유를 항상 마셔대는 탓에 매번 이마트 인터넷 쇼핑몰로 두유를 몇 박스 씩 주문하곤 하는데, 그 중 하나였다. 내가 초저녁에 마신. 하시는 일 모두 잘 되시고 건강하시길 빕니다. 따위의 누굴 보라고 적어 놓은 건지 모르겠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두유 따위에. 삼육 두유 따위. 그 작고 힘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두유 따위에 그딴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난 와인을 마셨고, 귤을 까먹었다. 누구 좋으라고. 누구 보라고. 그런데 두유 따위에. 시발. 그 두유도 내가 집에 안 붙어 있으면 시킬 수가 없다. 엄마는 인터넷을 할 줄 모르고, 취미도 없고, 의욕도 없으니까. 그런데 난 요즘 집에 붙어 있질 않잖아? 내가 붙어 있질 않으니 엄마는 두유를 직접 사와야 한다. 그 무거운 걸. 근데 난 또 집구석에 들어와서는 편하게 두유를 쪽쪽 빨아 마시잖아? 난 여전히 나이를 먹고도 부모 젖이나 빠는 나쁜 년이야. 알면서도 맨날 늦거나 외박을 밥먹듯이 한다.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이 중요해서. 시발 그게 다 뭐야? 밖에서 착한 척, 웃긴 척 온갖 척척척. 그러고선 연락도 제대로 안 하지. 그냥 잊어버리거나 잔소리 듣기 싫어서 연락을 먼저 하지 않는다. 연락을 잘 안 하는 게 집안 매력이기도 했는데. 난 오늘 아무 관계도 아닌 그의 연락을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이 특별한 날인 걸 까맣게 잊어버리고선. 나는 이런 인간이야. 나밖에 모르지. 그러면서 누굴 챙겨? 웃기고 자빠졌다. 거기다 지금은 왜 또 이렇게 여기서 난리야. 이게 다 술 때문이다. 아 젠장... 이런 거지같은 마무리라니. 하지만 끝까지 나는 자는 척을 한다. 자고 나서 머리가 조금 차분해지면 그때 오늘 있었던 일을 마저 보고 받아도 돼. 늦지 않아. 오늘 내가 기분이 나빴던 것을 위로받고 싶어 전화를 걸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고쳐 생각해보니 이런 이유 따위로 누구에게 위로받을 수 있겠어? 결국 내 잘못인데. 가끔 얼토당토 않은 일로 빈정이 상해서 누군가에게 위로 받고 싶어져 집을 막 나가버리는 일이 왕왕 있었다. 동네 친구가 그 희생자였다. 물론 그녀 역시 나에게 쏟아내기 위함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난 그녀의 고민이나 슬픔 따위 제대로 받아주질 못하고 있었다. 그저 내 안의 울분을 삭히기 위해 그녀를 이용했다. 불러냈다. 단순히 혼자 술 마시기 싫어서. 시발 술이 다 뭐라고. 미안하군. 어차피 내 슬픔과 분노는 나밖에 이해할 수 없는 건데. 나 혼자 삭히는 걸 나름대로 잘 하는 편이라고 자부했는데. 젠장.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그냥 닥친다. 나는 지금 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