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602

2012. 6. 3. 02:25숨죽인마음

0. 걱정하지마, 난 조금 느릴 뿐이야.

1. 무미건조한 눈으로 혈액형이 뭐에요? 라고 묻는 그의 말에 마치 "제 자랑은 아니지만" 따위의 늬앙스로 나는 오형이요 라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가 던진 수많은 질문들 중에 내가 유일하게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것이란 그따위의 것뿐이었다. 아무 이면지에나 급하게 프린트한 이력서에 그는 매우 형식적이면서 지루하단 태도로 '오형'이라고 받아적을 뿐이었다. 면전에서 날 부끄럽게 만드는 텅텅 빈 이력서 위, 여러가지 단어들이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 수많은 단어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제대로 끼워넣지 못한 나는 그저 지금 이 자리에서 어서 도망치고 싶단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오형이라고 답한 순간, 난 정말 망했구나, 싶었다. 연이어서 그는 대충 시간을 때우려는 듯 술은 잘 마셔요? 따위의 질문을 던졌다. 정말 망했구나. 여태껏 많은 면접을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대게 날 떨어뜨린 곳에서만 술을 잘 먹느냔 질문을 하곤 했었다. 말 그대로 시간때우기임에 틀림없는, 무의미한 질문들. 내게 어떤 종류의 술을 즐겨 마시는 지까지 물었다. 확실하다. 난 떨어졌다. 망했다는 확신이 들자, 그 후로는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나 스스로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어보려는, 혹은 기회를 주려는 듯한 질문이 던져졌다. 하지만 정말이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경험삼아'란 안일한 생각으로 간 내게 그 지푸라기 같은 기회를 잡을 능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난 흔치않을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꼴이었다. 더 이상의 어떠한 언지도 듣지 못한 채, 수고하셨어요 란 상냥한 거절의 말을 들으며 설레이는 마음으로 열었던 문을 절망에 빠져 다시 열고 나왔다. 시계를 보니 고작 삼십 분이 지나있었다. 체감상으론 한 세 시간은 지나있는 듯 했다. 터덜터덜한 발걸음으로 한 낮의 햇살을 맞으며 으슥한 지하철로 곧장 몸을 틀었다. 시내 한 복판에서 혼자서도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것은 많았지만, 뭔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입만 산 인간인지, 굳이 저 바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껴서 뼈저리게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냥 어서 이 현실에서 벗어나 집에 쳐박히고 싶었다. 나는 또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2. 집에 오자마자 맥이 풀린 채로 거의 12시간을 내리 잤다. 아무 의욕이 나질 않았다. 계속 누워 있고만 싶었다. 이대로 녹아 없어져 버렸으면, 하고 바란 건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불의의 사고로 죽거나, 누군가에게 칼 맞아 죽지 않는 이상은 어떻게 죽어도 별 여한은 없을 거란 내 평소 생각대로, 그냥 깔끔하게 녹아 없어져 버릴 수 있다면, 하고 꿈에서도 바랐다. 자는 동안에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의 꿈들을 연이어 꾸었다. 내가 얼마나 실패했는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고작 한 번의 실패로 이렇게 멘탈붕괴가 되어서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느냐만은, 어쩌겠는가. 난 안 그래보여도 의외로 신경이 과민한 인간이었다. 그동안 나 스스로는 아니라고 여겼지만. 그 결과 악몽의 연속으로 오히려 심신이 더 지쳐 결국 잠과의 이별을 선언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은 하나 변한 게 없었고, 그대로였다. 여전히 아무도 내게 독촉하지 않았고, 날 루저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난 곧 루저가 되어버릴까봐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따로 노력하지는 않고, 입으로만 전전긍긍. 아니 이미 이건 루저가 아닌가? 하지만 세상에 위너만 있어야 하나? 루저도 적당히 있어야 사회구조상 맞지 않나... 따위의 헛소리들을 지껄여가며 다시 벌렁 나자빠졌다. 다행히 아직까지 내 방은 시원했다. 구석에 쳐박힌 방이라 다행이었다.

3. 돈이 없으면 밖을 쳐놀러나다니질 말아야 하는데, 남한테 꿔서까지 쳐놀러나다니는 놈들이 있다. 이런 놈들은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 볼 가치도 없다. 

4. 아무도 타고난 성질은 바꿀 수가 없다. 적당히 피하면서, 타협하면서 사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