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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11. 00:49숨죽인마음

0. 

 아주 고요하지만 내 안에서는 폭풍이 휘몰아쳤던 며칠 간이었다. 지금도 태풍의 눈 속에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다 정리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인간은 AI가 아니여서 그런지 구질구질함이 조금 남아있는 게 사실이다. 내 개인사 외에도 가족들 문제 역시 그리 나아진 바가 없다. 2018년은 내게 그리 즐거운 기억으로 남을 해는 아닌 것 같다. 



1.

 한달을 매일, 꼬박꼬박 헤어짐을 상상하고 소원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날! 귀국일에도 어김없이 모든 일은 내 예상을 빗겨나가고 말았다. 우리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 숨막히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남지 않은 이 쓸모없는 시간들을 어거지로 꾸역꾸역 흘려보낸 뒤에 (공항에서는 정말 핸드폰만 하느라 눈깔이 빠지는 줄) 한국 땅을 밟았을 때 비로소 숨이 트였다. 서로의 옆자리를 비운 채로 앞뒤로 앉아 오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상상을 했고 연습을 했다. 어떻게 하면 아주 간결하게, 나름의 지난 시간들에 대한 예의를 차리며 이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습게도 그 새끼는 정말이지 비겁하고 약해빠진 새끼여서 지하철에서 내게 먼저 내리라는 말로 나를 보내버렸다. 사실 공항에서 나는 영원히 헤어지고 싶었지만, 사람이 많아서 예의상 지하철 역까지 어쩌다보니 따라가게 된 것인데. 또 이렇게 어이없이, 정말이지 허무하게 또 그렇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곧장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오랜만에 내 친 자매같은 친구들을 만나 목이 쉬도록 욕을 하고 털어내고 노래방에서 난리를 치고 그 정도로도 모자라서 20대 청춘들이 들끓는 클럽에 찾아가 첫 차가 뜰 때까지 몽롱한 상태로 있어보니, 금새 괜찮아졌다. (더불어 또 한 번 깨달았다. 아 머한민국 와꾸들 다 좆창났내,,ㅋ 다 어디 갔냐고, 중동갔냐고~~ 비비탄 힘조!!!)

지난 2년이 넘는 시간이 아까운 것이 아니다. 그 시간은 그 시간들대로 내게 의미가 있었다. 분명 내 인생에서 다시 없을 가장 로맨틱한 순간들이었다. 그 시간동안은 그 사람이 내게 좋은 남자친구로서의 역할연기를 잘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살면서 그래도 이런 추억 하나 쯤은 남길 수 있어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렇게 마지막이 너무 충격적으로 소박(?)해서 더 큰 미련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고마워해야하나? 뭣보다 나와 같이 비혼의 길을 굳게 다짐하며, 십 여년이 넘는 시간을 만난 인연을 정리한 친구도 있어 서로 마음의 위안 아닌 위안을 삼으며 하루를 또 보내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그저 내가 사랑했고 추억하는 그 사람이, 세상에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애석할 뿐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존재하나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나의 사랑. 사랑은 끝났고, 변하고, 사라진다. 그것은 현물화시킬 수 있는 가치도 아니며, 모두에게 동일하고 공평한 재화도 아니다. 너무나 변하기 쉽고, 속이기 쉬운, 알아차리기도 어려운 그 어떤 것이므로, 잠시 잠깐 이 긴 생애에서 내가 느낄 수 있었다는 것. 그 사실 하나에 만족한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남녀관계따위는 맺지도, 믿지도, 그것에 힘 쏟으려 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하루를 시차적응(?)에 투자하고 나니, 다음 날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 어쩌라고? 안 그래도 여행경비를 생각보다 (내가 원해서 간 여행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너무 많이 써서, 그리고 중간에 대신 결제해준 것도 있어서 마음의 빚과 마지막의 미련까지 모든 것을 청산할 겸 돈을 어느 정도 송금하고 완전히 끝낼 참이었다. 그런데 이 새끼는 무슨 꿍꿍이인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다시 손을 내미는 제스츄어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야 약 먹었나? 너 혼자 꿈꿨니? 이게 단순한 사랑싸움 따위로 치부될 것이었나? 완전히 남보다도 못한 남으로 귀국을 했는데, 이제와서 미안하다니 무슨 개소리야. 지나가던 옆집 뽀삐가 웃기지도 않아서 콧김 뿜을 소리네. 아직까지 적당한 금액의 액수를 정하지 못해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 참이다. 헤 정말 나 개념녀 아니냐? 아무튼 도태남의 마지막 발악에 정말 더 해줄 말이 없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도 이 세상에 없듯, 널 사랑했던 사람도 이제는 없다. 노래방에서 에일리의 노래를 그렇게 불렀더랬다. "내 몸에 손 대지 마 소름끼치니까"



2.

 할머니는 내가 여행을 다녀온 사이에 요양원으로 가셨다. 할머니는 큰 집을 나오던 날, 방문을 걸어잠구고 오랫동안 꼼짝을 않고 계셨다고 했다. 할머니는 어쩌면 다 듣고 보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문밖에서 마음이 다급해진 어른들은 결국 자리에 없던 나의 아버지의 이름을 대고 할머니를 꾀어냈다. 말 그대로 속아서 요양원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첫번째 요양원은 겉보기에만 번지르르했고,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많은 노인 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적은 요양보호사들은 노인 케어 외 과중한 업무들과 무자비한 근무시간 등 열약한 노동환경에 놓여져 있었다. 결국 피해를 입는 건 어처구니 없게도 시설에 맡겨진 노인들이었다. 할머니가 침대 밖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귀찮다고 휠체어에 하루 종일 묶어놓았다고 한다. 결국 할머니의 손 발은 퉁퉁 붓고 기력까지 잃으셨다. 요양원에 간 지 며칠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이후 내 어머니는 매일 오랜 시간 면회를 하며 지켜보았지만, 그곳의 처우는 나아질 것이 없었고 (이럴려면 요양원에 모시는 의미도 없고) 결국 더 나은 시설을 알아보고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단기간 계속된 이사 끝에, 할머니는 어쩌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란 사실을 알아버렸는지도 모른다. 텅 빈 눈으로 병실 먼 곳, 어느 한 꼭짓점만 보시던 할머니는 어느 날 나의 어머니에게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고 한다. "자식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아직 좀 더 살아야 되겠다." 이 년만 더 있으면 그녀는 한 세기를 모두 지켜본, 살아내 온 또 한 명의 역사의 산 증인이 될 것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치매일리가 없었다. 하지만 자식들은 그 누구도 그런 그녀를 감옥 아닌 감옥에서 꺼내주질 않았다. 그녀에겐 침대 위가 아닌, 그저 작은 내 방 한 칸이면 충분했을 것이지만, 그 한 칸을 따뜻하게 덥히기 위해서 노력을 더 하기에는 그녀의 큰 아들도, 큰 며느리도 너무 지쳤고, 아니 더 큰 시련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수저 드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거기다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알아봤던 내 아버지의 인사조차도 무시해버렸다. 요양원으로 모신 이후로 다시 내 아버지를 알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알은 채 하지 않으셨다. 내 아버지 역시 노모의 처음보는 냉랭한 태도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잊혀지는 것과 무시당하는 것은 천지차이니까. 

덕분에 요 며칠 내 어머니가 고생 아닌 고생을 하고 있다. 할머니는 영양실조가 걱정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다. 또 한번의 이사로 그녀는 영영 입도 마음의 문도 닫아버렸다. 계속된 거부로 링겔은 발등에 꼽혔고 붕대로 칭칭 감겨진 상태였다. 고모, 사촌들과 병문안을 가니 이불을 뒤집어 쓰신 채 모른 척 가만히 눈만 감고 계셨다. 나를 버린 자식들이 너무 미워서, 세상이 너무 미워져서 더 이상 어디에 하소연할 힘도 그럴 의지도 잃어버린 할머니는 그저 본인을 괴롭히는 것으로 그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문득 지난 한 달 간, 내가 더 이상 화를 내는 것도 포기하고, 모든 걸 체념한 상태로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었던 걸 생각하니, 다 늙은 자식들을 이렇게 괴롭히는 할머니가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매일 그렇게 그 좁은 병실 안에 가만히 누워 눈도 감고 귀도 닫고 입도 꾹 다문 채로, 그녀는 어떤 무너지는 마음으로 1분 1초를 보내고 계신걸까. 이 기약없는 시간들을.



3.

 이번 병문안으로 거진 십 여 년 만에 만난 고종사촌오빠는 사실 지난 여행 기간 중에 뜬금없이 연락을 해왔었다. 자신이 하는 작품에 초대를 하고 싶다며. 고모에게 그 동안 들은 바가 없었기에 '무슨 작품?'하며 내 어머니에게 되물었지만, 다들 알 턱이 없었다. 고모는 못마땅해 지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본인 아들이 예술한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 다만 중간 중간 연애가 깨졌다, 직장을 옮겼다 등의 근황만 전했을 뿐이었다. 그 직장 역시 예술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그냥 잘 풀리지 않는 사람 정도로면 인식했었다. 하지만 이번 만남에서 다시 보니 자신의 직업에 나름 자부심도 있고 꾸준히 해왔었다고 한다. 이번에도 새 작품 준비 중이라고 했다. 적잖이 충격이었다. 다 큰 자식이 나름의 꿈을 차근차근 이뤄가고 있음에도,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못 본 체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부모가 자식을 믿어주지 못하고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서로에게 큰 고통이고 아픔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나의 방황을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주시는 나의 부모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아무튼 이번 만남으로 친척들의, 정확히는 내 사촌들의 근황이 업데이트 되었다. 세상이 원래 그렇게 되어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사촌 중에 결혼한 이는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큰 아버지의 아들 뿐이었다. (그마저도 아빠와 나이 차가 거의 안 나는 오빠여서 내가 너무 어릴 때 결혼해버렸다. 조카가 벌써 스물!) 여전히 집에만 가만히 틀어박혀 지내는 친구도 몇 있었다. 덕분인지(?) "왜 내 자식만 이 모양 이 꼴일까?"란 자책과 비교는 내 부모님은 거의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포기한 것일 수도. 무엇이 되었든, 남과의 비교는 괴로움만 낳을 뿐이다. 모든 관계에 악영향만 끼친다. 좋지 않아.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그러니 굳이 서로 더 누가 병신이니 하며 상처를 후벼 팔 필요는 없다. 그저 모른 척 지나가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