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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4. 02:35숨죽인마음


   나의 삶은 하루하루가 코미디고, 시트콤이다. 대부분의 청춘들의 현재가 그러하듯이. 오늘은 특히 더 그랬다. 매일 매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는게 인생이라지만, 참 그래도 웃음만 나서 다행이다. 
  곤파스가 지나가는 동안, 난 집에서 단잠을 자고 있었다. 덕분에 난 정말 새파란 하늘을 보면서 하루를 기쁜 마음으로 시작했다. 이제 다시, 걷기 좋은 계절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일찍 퇴근도 했겠다, 친구와 약속시간까지 시간도 좀 남았겠다, 해서 근무지에서 걸어서 시청까지 갔다. 사실 새단장한 광화문의 교보문고를 구경하고 싶었지만, 서울에 맨날 다녀도 서울지리를 모르는 나로서는… 그건 너무 힘든 도전이었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언니들 덕에 자주 걸었던 시청까지, 청계천까지 좀 걸어야지 생각했다. 의외로 길을 잘 찾아 걸어서 스스로 뿌듯해 했다. 서울구경이었달까, 새삼. 스스로 이제서야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며, 이정도면 유럽 혼자 여행다녀도 문제 없겠군! 싶었다. 그러면서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서울시립미술관에 갔다. 요즘 미술 관련 책을 읽고 있어서, 전시회에 급 관심이 돋던(!) 요즘이었기에 자연스레 발걸음은 그리로 향했다. 물론, 시청 근처에 아는 곳이 그곳밖에 없기도 했다. 날씨는 너무 좋았고, 여유롭게 그 곳을 걷는 내 스스로에 만족해하고 있었다. 옛날에 학교 과제로 이곳을 찾을때는 급급한 걸음으로 날아가듯 걸었는데. 여튼, 돌길을 걸어서 시립미술관 안에 들어섰다. 온갖 꽃들과 나무들로 우거진 그 길이 너무 멋져서 한참을 또 바라봤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지금 그 모습들을 바로 캔버스에 옮길텐데! 으. 그런데 구월 칠일 부터 하는 서울미디어어쩌고 전시회 준비중이었다. 덕분에 미술관 안은 텅 비어있는 상태. 그래서 약간 아쉬운 마음으로 다른 곳에 가려고 나왔다. 하늘도 좀 보면서 느릿느릿. 막 돌길을 내려가려는데, 어느 외국인이 말을 걸었다.
  시트콤 시ㅋ작ㅋ
  처음엔 그냥 전시 안하냐고 물어보길래, 나름 친절한 서비스맨으로서(웃음) 안되는 영어로 몇마디 대화 아닌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대뜸 그럼 이제 뭐할꺼냐고 묻는게 아닌가. 그래서 그냥 옆에 덕수궁이나 가볼까 한다고 했다. 여지껏 난 덕수궁 한 번 가본 적이 없었다! 매일 그 앞을 지나다니기만 했지, 정말. 그래서 큰 맘 먹고 오랜만에 이 여유를 즐기려했는데, 이 낯선 외국남자가 동행을 하자고 제안했다. 순간, 이 곳이 서울 맞는감? 근데 나도 모르는 내 안의 내가 OK를 외치며 같이 ㄱㄱ 무비무비! 짧은 영어로 엄청난 리액션을 선보이며 근근히 대화를 이어나갔다. 통성명도 하지 않은채로, 하이파이브를 세 번 정도 하고 (이유는 별거 없이, 그냥 와 너 멋지다~ 너두~ 와 너 컨버스 신었네? 나두! 예~ 예~ 아트 좋아해? 응! 예!) 서울시립미술관을 벗어나 돌담길을 걸었다. 정말 내 영어의 한계를 느끼며 (학원을 난 왜 그리 결석했는가! 이럴 땐 이런 표현을! 하고 배웠지만, 당췌 생각이 나질 않더라) 어찌되었든, 계속 대화는 했다. 신기했다. 그래, 영어 못해도 대화는 가능하다! 아주 짧고 단편적이라는 게 문제지만? 여튼, 스스로에게 브라보를 외치며 계속 걸어나가다가 서울 광장으로 자연스럽게 갔다. 서울 광장에서는 공연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가 되어서야 통성명을 했다. 그의 이름은 프랭크. 소위 아티스트인 그는 홍대에 사는 외국인이었다. 한글도 느릿느릿하지만 읽을 줄 알고, 쓸 줄도 알았다. 오오 신기해. 그는 나의 짧은 영어에도 굴하지 않고(웃음) 내가 마음에 들었다며, 같이 된장 비빔밥을 먹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난 그날 저녁 친구와 피자를 먹을 예정이었다. 오 이런 아이러니. 근데 처음에 가볍게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달리, 점점 나와 친해지려고 하는 그의 모습에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그전까진 아무 생각없이 아무 말이나 지껄이던 주제에. (낯선 외국인과 계획에도 없던 시청 나들이라니…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거기다 난 영어를 못하는데? 대화가 되고 있어? 오 신기해? 이건 모지?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여튼, 순간 현실을 자각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약속이 있다고 미안하다고 하자, 그럼 친구도 같이 된장비빔밥을 먹자고 했기 때문에. 그 친구는 나보다 영어 능력자였으므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이상한 사람 아니냐며 말하면서도 내 상황이 너무 웃겼는지 계속 웃어댔다. 그녀와 나의 인생이 언제나 시트콤같기는 했지만, (우리의 고등학교 시절은 참 다사다난했다) 이런 일까지 벌어지다니! 요즘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를 열심히 보긴 했지만, 이건 너무 드라마 같잖아? 여튼, 도움을 청했지만 도움은 커녕!(웃음) 그때 리허설 중이던 밴드의 음악에 맞춰 프랭크는 난데없이 춤을 추자고 했다. 난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쥐고, 다른 한 손은 프랭크의 손에 이끌려 돌고, 돌리고, 돌았다. 시청 잔디밭 한 복판에서! 이게 뭐지? 그 순간은 정말 정신이 나가는 줄 알았다. 너무 웃겨서 낄낄 거리다가, 아 빨리 벗어나고 싶어졌다. 내 능력을 초과했다. 더이상 사정 설명을 영어로 하기 힘들어서 징징 대면서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지(웃음), 순순히 날 보내줬다. 다만, 휴대폰 번호를 교환한 후. 내 휴대폰 번호를 적는데, 내 이름을 한글로 손수 적는 모습에 조금 감동했다. 오오 한글을 쓸 줄 아는 외국인이라니! 처음 봐! 이 글로벌 시대에, 난 오로지 한쿡인만 아는 애였으니까. 여튼, 이런 컬쳐 쇼크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후들거리는 마음을 겨우 겨우 진정시키며 그와 헤어졌다. 오, 지나고 나니 시청 한 복판에 버려둔 채 도망친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네. 하지만, 난 오픈 마인드인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코리안 걸인걸? 여튼, 재미난 경험이었다. 그러고보니, 프랭크 나이도 모르네.
  이 일을 끝으로 하루가 무사하게 마무리 되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결국 친구와 만나서도 일이 터졌다. 하지만 그것까지 일일이 열거하기엔 너무 힘드므로, 그만 여기서 끝. 그러나 아쉬워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서비스의 세계는 끝이 없고, 짜증 가득하다는 것!